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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문학비평 <바깥, 밤>

「문학의 공간」 V부 영감 – 1장 바깥, 밤
모리스 블랑쇼

최초의 밤, 그것은 아직도 낮의 건축물이다. 그것은 밤이 되는 낮이며, 밤 속에 세워지는 낮이다. 밤은 낮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밤은 낮에 대한 예감이다. 밤은 낮의 저장고이며 깊이다. 모든 것은 밤 속에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낮이 있는 것이다. 낮은 밤에 연결되어 있다. 낮은 시작하고 끝남으로써만 낮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낮의 정의인 것이다. 낮은 시작이며 끝이다. 낮은 태양과 함께 떠오르고, 태양과 함께 끝을 맺는다. 낮을 지칠 줄 모르고, 근면하고,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낮을 낮의 끊임없는 일로 만드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되려는 그 자랑스런 염려와 더불어 낮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밤이라는 요소는 더욱더 빛, 그 자체 속으로 은둔할 위험에 처하게 되며, 우리를 밝게 비추어주는 것은 더욱더 어둠의 것이 되고, 더욱더 밤의 불확신과 과도함이 된다.

그것은 본질적인 위험이다. 그러나 낮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결심들 중의 하나이다. 낮이 취할 수 있는 결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경우 밤은 인정된다. 그러나 단지 한계로서, 한계의 필연성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인정된다. 그 너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적인 절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둘째, 밤은 결국에 가선 낮이 흩어버려야 할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낮은 오로지 낮이라는 왕국에서만 일한다. 낮은 자기 자신의 정복이며, 노동이다. 낮은 무한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낮은 그 임무들을 성취함에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밖에 전진하지 못한다. 그리고 힘차게 그 한계들과 경계선에 매달린다. 단순히 어둠을 쫓아내는 빛의 승리인 이성은 그렇게 말한다. 셋째, 밤이란 낮이 흩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밤은 낮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 보존해야 할 것, 한계로서가 아니라 자체로서 기꺼이 맞아들여야 할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낮 속에 밤이 지나가야 한다. 밤은 낮이 되면서 빛을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고, 밝음을 표면의 반짝임이 아니라 깊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광채로 만든다. 이때 낮은 낮과 밤의 총체이다. 변증법적인 움직임의 위대한 약속이다.

낮과 밤을 대립시키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동작들을 대립시킬 때, 암시되어지는 것은 아직도 낮의 밤이다. 낮의 밤인 밤, 진정한 밤이라 말해지는 밤이다. 왜냐하면 그 밤은 그 자신만의 법칙이, 정확하게 말해서 낮에 대립하는 의무를 그에게 부여하는 법칙이 있듯이, 그 자신만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어두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균형을 보장하는 것이다. 절제는 무절제의 존중이며 또한 절제는 무절제를 버릇없이 굴지 못하게 하고 꼼짝 못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인들에게는 밤의 딸들이 욕보임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밤의 딸들이 정착하는 그녀들만의 영역이 있어 밤의 딸들이 방황하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그녀들이 조심성이 있고, 이 조심성의 맹세를 지켜야 하는 것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밤은 언제나 다르다. 우리가 그 또 다른 밤의 소리를 듣고, 또 그것을 포착했다고 믿는 것은 오로지 낮 속에서이다. 낮에 또 다른 밤은 깨질 수 있는 비밀이며, 베일이 벗겨지기를 기다리는 어둠이다. 밤에 대한 열정은 오로지 낮만이 느낄 수 있다. 죽음이 열망의 대상이 되고, 계획되고, 결심되고, 결국 도달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낮에뿐이다. 또 다른 밤이 마치 모든 속박의 끈들을 부수어버리고, 종말을 원하며, 심연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낮 안에서이다. 그러나 밤 속에 또 다른 밤은, 우리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반복이며,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포만이며, 근거도 깊이도 없는 것의 반짝임이다.

또 다른 밤의 덫, 그것은 우리가 틈입할 수 있는 최초의 밤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고뇌로써 돌입하는, 그러나 고뇌가 당신을 감추어주고, 불안정성이 피난처가 되는 최초의 밤이다. 최초의 밤 속에서는 앞으로 전진하면 밤의 진실을 찾아낼 것만 같고, 좀 더 앞으로 나가면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향해 가게 될 것만 같다 ―― 사실 이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단지 그 최초의 밤이 아직도 세계에 속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하여 낮의 진실에 속하고 있는 한 옳은 이야기이다. 이 최초의 밤 안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몸짓은 아니다. 카프카의 <땅굴>이라는 작품 속에 나오는 짐승의 작업은 그러한 몸짓을 떠올리게 한다. 땅굴 안에서 우리는 땅 위 세계에 대한 단단한 방어를 확보한다. 거기서 우리는 땅 아래의 불안전성에 노출된다. 우리는 낮의 방식으로 건설한다. 그러나 그곳은 땅 밑이다. 높이 세워지는 것은 가라앉으며, 우뚝 서는 것은 무너진다. 땅굴이 바깥세계에 견고하게 닫힌 것으로 여겨지면 여겨질수록 그 바깥과 함께 그 땅굴 속에 갇힐 위험은 더욱 커진다. 출구도 없이 위험에 내맡겨질 위험은 더욱더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밀폐된 내밀한 공간으로부터 모든 외부의 위험이 멀어졌다고 여겨질 때, 그 때 바로 이 내밀성 자체가 위협적인 외부의 낯선 것이 된다. 위험의 본질이 예시되는 것이다.

밤에는 항상 짐승이 또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밤이다. 그 소리는 전혀 무서운 것도 아니요, 굉장한 무엇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 유령이나 법열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 이것은 단지 들릴까말까한 속삭임, 정적과 구별이 될까말까한 소리, 고요 속에 흘러내리는 모랫소리일 뿐이다. 아니 그 소리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일하는 소리, 구멍 파는 작업의 소리, 흙을 운반하는 일소리이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의식하면, 그 소리는 이제 더 이상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끝없는 동작으로 열려져 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모든 것은 계속되었다.” 편집자들 중 어느 사람은 이 카프카의 이야기에 몇 페이지가 부족하다고, 이 이갸기의 주인공이 쓰러져 죽는 결정적인 싸움을 묘사하는 몇 페이지가 없다고 덧붙여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카프카의 이야기를 아주 잘못 읽은 것이다. 결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싸움에서 결단이란 없다. 그리고 싸움이란 더더욱이 없다. 오로지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점점 더 위협적이게 되는 그 위협, 그러나 무한하고도 막연한 위협, 그 불분명한 자체 속에 온통 내포된 위협의 기다림, 그것으로의 접근, 그것에 대한 의혹과 그것의 부침(浮沈)만이 있을 뿐이다. 그 짐승이 멀리서 예감하는 것, 영원히 그를만나러 다가오며 영원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 괴물 같은 것, 그것은 바로 그 짐승 자신이다. 그 짐승이 한 번이라도 그것의 존재와 마주 대할 수 있다면, 그 짐승이 만나게 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부재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자가 된 자기 자신이어서 그 짐승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또 다른 밤은 언제나 타자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밤의 소리를 듣는 자, 그는 스스로에게 타인이 된다. 그 또 다른 밤에 가까이 가는 자, 그는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가 아니라, 잘못해서 거기서부터 멀리 돌아가는 자, 이곳에서 저곳으로 방황하는 자가 된다. 최초의 밤에 들어갔다가 용감하게 그 밤의 가장 깊은 내밀성을 향하여, 본질을 향하여 가려고 애쓰는 자는 어느 순간 또 다른 밤의 소리를 듣게 된다. 자기 자신의 발걸음 소리, 정적을 향해 가는 발걸음 소리가 반향되어 들려오는 영원한 메아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마치 속삭이는 거대함처럼 그 소리를 그에게, 그 텅 빈 공허를 향해 되돌려보낸다. 그리고 그 텅 빈 공허가 이제 그를 만나러 오는 존재인 것이다.

또 다른 밤이 다가옴을 예감하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이 밤의 심장부에 다가가고 있음을, 그가 추구하고 있는 이 본질적인 밤의 심장부에 다가가고 있음을 예감하는 자이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에 그는 비본질적인 것에 몸을 내맡기게 되고, 모든 가능성을 잃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막이 신기루의 유혹이 되는 바로 그 지점을 피해 가라는 충고가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피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신중성은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밤에서 또 다른 밤으로 이동해가는 정확한 순간은 없다. 또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되돌아와야 할 경계선도 없다. 자정이 결코 자정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들이 던져졌을 때, 그때가 자정이다. 우리는 그 주사위들을 자정에밖엔 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최초의 밤에서 방향을 돌려 돌아가야 한다. 최소한 이것은 가능하다. 낮 속에 살고 낮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그렇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낮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결국 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낮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밤을 낮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이고, 밤을 작업으로, 거처로 만드는 것이며, 땅굴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땅굴을 건설한다는 것은 밤을 또 다른 밤으로 열어놓는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에 몸을 내맡길 위험은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 위험에서 도망침은 그 위험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잡아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위험은 늘 당신을 뒤쫓아오고 늘 한 발자국 당신을 앞서가는 그림자이다. 방법적인 결심으로 그 위험을 추구함, 그것 역시 그 위험을 알지 못함이다. 위험성을 알지 못함, 그것은 삶을 더욱 가볍게 하고, 임무들을 더욱 안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위험을 알지 못함 속에 위험은 아직도 숨겨져 있으며, 망각은 위험에 대한 기억의 깊이이다. 그 위험을 예감하는 자는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다. 그것에 가까이 접근하는 자, 그가 그 안에서 비본질적인 것의 위험을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으로의 접근에서 본질적인 것을 보며, 그럼에도 자신이 결부되어 있다고 느끼는 모든 진실, 모든 진지성을 거기에 희생시킨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것이 실수 ― 방황의 힘일까? 이것이 밤의 매혹일까? 그러나 이것은 능력이 없는 것, 부르지 않는 것, 다만 무심코 이끌어들이는 것이다. 자신이 이끌어들여졌다고 믿는 자, 그는 자신이 깊이 무시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저항할 수 없는 사명의 구속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의 지배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그는 단지 거기에 저항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저항할 수 없다고 부르는 것이며, 그를 부르지 않는 것을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 자신의 무(無)를 구속이라는 거만함에 기대어 받쳐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 하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영감’에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감에서 도망쳐버리기 위해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것일까? 또 오로지 그 공허를 깊이 파들어가서, 그 공허를 점점 더 심화시키고, 그들 주위에 텅 빈 공허를 만듦으로써 땅굴과도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일까?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들이 이 세계와 일의 진실을 배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한 가지만을 염려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왜 스스로 봉사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일까. 그들이 있는 그 지점에서, 왜 아직도 그들은 그들이 안전과 구원을 추구하는 이 세계에 봉사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 그들이 배반하는 것은 진정한 작업의 몸짓뿐만 아니다. 그들 무위의 실수·방황을 꺼림칙한 양심으로 배반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양심의 거리낌을 명예 혹은 봉사로 눌러버린다. 어떤 사명을 완수한다는 감정, 문화의 수호자이며 민족의 신탁이라는 감정으로 눌러벌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땅굴을 건설하는 것조차 소홀히 하고 있을 것이다. 이 피난처가 그들을 보호하면서도, 내면에서 그들이 잃어야 할 것을 보호하지나 않을까, 그럼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너무 확고히 보장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들이 서서히 미끄러져가는 불확신의 지점으로서의 접근, 불분명과의 ‘결전’을 멀리 물리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땅굴을 건설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 이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정을 적은 수첩을 남기지 않는다. 이름도 없는 익명의 군중 속, 익명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별 불가능한 불분명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길을 가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중요성이 없는 것을 향한 희망 없는 이런 몸짓을 하는 것일까?

책세상|1998년 6월 10일 초판 1쇄|모리스 블랑쇼 作 문학의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