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La Porte Etroite (주)을유문화사 2009 초판 1쇄
앙드레 지드(Andre Gide) 지음 이동렬 옮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누가복음 13장 24절
1장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로 한 권의 책을 써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체험했고 나의 기력을 고갈시킨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나는 극히 간명하게 나의 추억을 적어 나가겠다. 이 추억이 군데군데 조각나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깁거나 잇기 위해 어떠한 꾸밈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추억을 치장하려는 노력이란, 추억을 얘기하는 데서 찾기를 바라는 마지막 즐거움마저 망쳐 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나는 열두 살도 채 안 되었다. 아버지가 의사로 지내시던 르아브르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게 되자, 어머니는 내가 학업을 더 훌륭히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파리에 살기로 결정하셨다. 어머니는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세내었고, 미스 애시버튼이 우리와 함께 거기서 살게 되었다. 이제 가족이 아무도 없는 미스 플로라 애시버튼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가정교사였다가, 뒤이어 어머니의 동반자가 되고 또 곧 친구가 된 분이었다. 소복을 한 것으로만 나에게 기억되는, 한결같이 온화하고 슬픈 모습의 그 두 여인 곁에서 나는 살아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상당히 오랜 후의 일로 생각되는데, 어느날 어머니는 당신의 아침 모자에 달던 검은 리본을 연보랏빛 리본으로 바꿔 다셨다.
”엄마! 그 색깔은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하고 나는 외쳤다.
다음날 어머니는 다시 검은 리본을 다셨다.
나는 섬약한 체질이었다. 내가 피로하지 않도록 온갖 관심을 기울이신 나의 어머니와 미스 애시버튼의 보살핌이 나를 게으름뱅이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내가 정말로 공부에 취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여름의 좋은 날씨가 시작되자마자, 두 분은 내가 도시를 떠날 시기가 왔다고, 도시에서는 내가 핼쑥해진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6월 중순께면 매년 여름 뷔콜랭 외삼촌이 우리를 맞아 주시는 르아브르 근교의 퐁괴즈마르로 떠났다.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으며, 노르망디 지방의 많은 다른 정원들에 비해 아무 두드러질 것이 없는 정원 안에 서 있는 3층의 하얀 뷔콜랭가(家)는 18세기의 많은 시골집들과 비슷하다. 그 집에는 동쪽의 정원 앞으로 20여 개의 커다란 창문이 나 있고, 뒤쪽에도 그만큼의 창문이 있으나, 양옆에는 창문이 달려 있지 않다. 창문에는 작은 정사각형의 유리들이 끼워져 있는데, 최근에 갈아 끼운 어떤 유리들은 녹색의 흐릿한 낡은 유리들 사이에서 너무도 투명해 보인다. 어떤 유리들에는 집안사람들이 ‘거품’이라고 부르는 흠집이 나 있는데, 그것을 통해 바라보면 나무가 꼴사납게 뒤틀리고, 그 앞을 지나가는 우편배달부에게는 갑작스럽게 혹이 매달려 보인다.
직사각형의 정원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원은 집 앞쪽으로 꽤 넓고 그늘진 잔디밭을 이루고 있는데, 모래와 자갈이 깔린 좁은 길이 잔디밭을 둘러싸고 있다. 이쪽으로는 담이 낮아져서, 정원을 둘러싸면서 너도밤나무의 가로수 길이 이 고장의 방식으로 경계를 지어 주는 농가의 마당이 내다보인다.
집의 뒤편 서쪽으로는 정원이 더 훤하게 트여 있다. 남쪽 과수장(果樹場) 앞의 곶이 피어나는 오솔길은 포르투갈 산 월계수의 무성한 장막과 몇 그루의 나무에 의해 해풍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북쪽 담을 따라 나 있는 또 다른 오솔길은 나뭇가지들 아래로 사라져 간다. 내 외사촌 누이들은 그곳을 ‘어두운 오솔길’이라고 부르며, 저녁 어스름이 지나고 나면 좀처럼 그 길로 접어들려 하지 않았다. 이 두 오솔길은 채소밭으로 통하며, 채소밭은 층계를 몇 계단 내려간 다음 낮은 쪽에서 정원에 잇대어진다. 그리고 채소밭 구석으로 작은 비밀 문이 뚫려 있는 담의 반대편에는 벌채림(伐採林)이 있고, 너도밤나무 가로수 길은 좌우 양편에서 이 벌채림에 다다르게 된다. 서쪽의 현관 층계로부터는 그 작은 숲 너머로 고원이 바라다보이고, 고원을 뒤덮은 농작물을 완상(玩賞)할 수 있다. 그다지 멀리 펼쳐져 있지 않은 지평선에는 작은 마을의 교회가 눈에 들어오고, 바람이 잔잔한 저녁에는 몇몇 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여름의 아름다운 저녁마다 우리는 저녁 식사 후면 ‘아래 정원’으로 내려가곤 했다. 작은 비밀 문으로 나가서 주위가 얼마간 잘 내려다보이는 가로수 길의 벤치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그곳, 방치된 이회암갱(泥灰岩坑)의 초가지붕 곁에 외삼촌과 어머니와 미스 애시버튼이 자리 잡곤 했다. 우리 앞의 작은 골짜기는 안개가 들어차고, 먼 숲 위에서 하늘은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이미 어두워진 정원에 늦게까지 남아 있곤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와 함께 나가는 일이 거의 없는 외숙모가 응접실에 남아 계셨다……. 우리 아이들로서는 거기서 저녁 시간이 끝나는 것이었지만, 더 늦게, 어른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들 방에서 책을 읽는 적도 종종 있었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우리는, 외삼촌의 서재에 초등학생용의 작은 책상들을 배치해 놓아 꾸민 ‘공부방’에서 지냈다. 외사촌 로베르와 나는 나란히 앉아 공부했고, 우리의 뒤에서 쥘리에트와 알리사가 공부했다. 알리사는 나보다 두 살 위이고, 쥘리에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이며, 로베르는 우리 넷 중에서 가장 어렸다.
내가 여기에 기록하려고 하는 것은 나의 첫 추억들이 아니라, 이 이야기와 연관되는 추억들일 뿐이다.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작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부터이다. 우리가 당한 상(喪)에 의해서, 나 자신의 슬픔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에 의해서, 나의 감수성이 지나치게 자극받아 새로운 감정을 유발시킨 탓인지, 나는 조숙했다. 그해 우리가 다시 퐁괴즈마르에 돌아왔을 때, 쥘리에트와 로베르는 그만큼 더 어려 보였으나, 알리사를 다시 보는 순간 나는 이제 우리 둘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렇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해이다. 우리가 도착한 직후에 어머니와 미스 애시버튼이 주고받던 대화가 내 기억을 확인시켜 준다. 어머니와 미스 애시버튼이 애기하고 있던 방에 나는 불시에 들어갔었다. 외숙모가 화제였는데, 외숙모가 상복을 입지 않았다거나 또는 벌써 상복을 벗어 버렸다는 일로 어머니가 화를 내고 계셨다. (사실 나에게는 검은 옷을 입은 뷔콜랭 외숙모를 상상하기란, 밝은 옷차림의 어머니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가 도착하던 그날 뤼실 뷔콜랭은 모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화해적인 미스 애시버튼이 어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겁먹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결국 흰 옷도 소복에 속하죠.”
”그 사람이 어깨에 두른 빨간 숄도 역시 소복 축에 든다고 말하시겠어요? 플로라, 당신은 내 화를 돋우시는군요!” 어머니가 소리쳤다.
내가 외숙모를 보는 것은 방학 동안뿐이었으므로, 항상 내 눈에 익숙한 그분의 활짝 트인 가벼운 웃옷 차림은 아마 여름의 더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러난 어깨에 외숙모가 걸치는 숄의 강렬한 색채 이상으로,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는 그런 차림이 더욱 어머니의 기분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뤼실 뷔콜랭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작은 초상화는 당시의 그녀의 모습, 입술 쪽으로 새끼손가락을 애교 있게 구부린 왼손 위에 얼굴을 가볍게 괸 습관적인 자세를 한, 옆에 앉은 자기 딸들의 큰언니로 오인될 만큼 너무도 앳된 그녀의 모습을 보여 준다. 굵직한 올의 머리그물이 목덜미 위로 반쯤은 흩어져 내린 곱슬곱슬한 머리채를 감싸 주고 있다. 웃옷 가슴 부분의 파인 곳엔, 까만 벨벳으로 만든 느슨한 목걸이에 이탈리아식 모자이크 메달이 매달려 있다. 펄럭이는 넓은 매듭이 달린 까만 벨벳 허리띠, 의자 등받이에 끈으로 매달아 늘어뜨린 넓은 챙의 부드러운 밀짚모자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앳된 모습을 더해 준다. 아래로 늘어뜨린 오른손은 접힌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뤼실 뷔콜랭은 식민지 태생이었다. 그녀는 자기 부모가 누군지 몰랐거나 아니면 아주 일찍 부모를 잃었다고 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로는 ,버려졌거나 아니면 고아였던 그녀를 아직 자녀가 없던 보티에 목사 부부가 입양을 해서, 곧 마르티니크를 떠나게 되자, 뷔콜랭가(家)가 정주해 있던 르아브르로 그녀를 데려 왔다는 것이었다. 보티에가와 뷔콜랭가는 빈번한 교제를 가지는 사이였다. 나의 외삼촌은 당시 외국에 있는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그분이 어린 뤼실을 만나게 된 것은 3년 후 그분이 가족 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분은 그녀에게 반해서 곧 구혼하는 바람에, 양친과 나의 어머니의 크나큰 근심을 자아냈다. 그때 뤼실은 열여섯 사링었다. 그동안 보티에 부인은 자녀를 둘이나 갖게 되었었다. 부인은 날이 갈수록 야릇하게 성격이 굳어져가는 양녀가 자기 자녀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살림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 모든 사정이 보티에 댁으로 하여금 외삼촌의 청혼을 기꺼이 수락하게 했노라고 어머니는 나에게 설명하셨다. 게다가 처녀로 자란 뤼실이 그들을 몹시 난처하게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르아브르 사회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사람들이 그처럼 매혹적인 처녀 아이를 어떻게 대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보티에 목사는 내가 나중에 알게 된 분으로서, 온화하고, 용의주도하고, 동시에 순진하며, 책략에 대해선 속수무책이고, 악의 앞에선 완전히 무력한 분이었기에……. 그 훌륭한 어른은 아마 궁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보티에 부인에 대해선 나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그분은, 거의 내 동갑으로 후에 내 친구가 된 넷째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뤼실 뷔콜랭은 우리의 생활에는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점심 식사가 지나고 나서야 자기 방에서 내려오곤 했다. 그러고는 곧 소파나 그물 침대에 저녁때까지 길게 누워 있다가 나른한 듯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윤기가 전혀 없는 이마의 습기라도 씻어 내려는 듯 때때로 손수건을 갖다 대곤 했다. 그 손수건의 섬세함과 꽃향기라기보다는 과일 향내에 흡사한 냄새에 나는 경탄하곤 했다. 이따금 그녀는 잡다한 노리개와 더불어 시계 줄에 매달려 있는, 매끄러운 은제 뚜껑을 가진 작은 거울을 허리띠에서 꺼내곤 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는, 한 손가락으로 입술을 건드려 침을 묻혀서 눈 꼬리를 축이는 것이었다. 자주 책을 들고 있었지만, 책은 언제나 닫힌 채였다. 책갈피에는 거북 등껍질로 만든 서표(書標)가 끼여 있었다. 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도, 누군지 보려고 시선이 몽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방심하거나 나른해진 그녀의 손에서, 또는 소파의 팔걸이나 그녀의 치마폭 주름 사이에서, 손수건이나 책이나 꽃이나 서표 같은 것이 땅에 떨어져 내리는 일이 빈번했다. 어느 날 책을 주워 본 적이 있었는데 ―이건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집임을 알고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저녁에 식사가 끝난 후에도 뤼실 뷔콜랭은 우리가 모여 있는 가족 테이블에 다가오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느린 마주르카를 흥에 겨워 치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박자를 깨트리고, 한 가지 화음을 누른 채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외숙모 곁에서는 야릇한 거북스러움, 일종의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혼란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어떤 막연한 본능이 나에게 그녀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플로라 애시버튼과 나의 어머니를 경멸한다고 느꼈고, 미스 애시버튼은 그녀를 두려워하며 어머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음을 느꼈다.
뤼실 뷔콜랭,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으며, 당신이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잠시 잊고 싶습니다……. 아무튼 나는 노여움 없이 당신에 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항상 똑같은 배경 속이므로, 때때로 겹쳐진 나의 추억이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음 해 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한 권 찾으러 응접실에 들어갔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내 나오려고 했으나, 평소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하던 그녀가 나를 불렀다.
”너는 왜 그렇게 빨리 내빼려고 하니? 제롬! 내가 무서우니?”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 손에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네 어머닌 어쩌면 이렇게 흉하게 옷을 입히니, 가엾은 녀석!……”
그때 나는 커다란 깃이 달린 일종의 선원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외숙모가 그 깃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선원복의 깃은 훨씬 더 젖혀 놓는 거란다!” 그녀는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면서 말했다. “자! 보렴, 이게 훨씬 낫잖아!” 그러고는 그녀의 작은 거울을 꺼내면서, 자기 얼굴에 내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드러낸 팔로 내 목을 감고서, 풀어헤쳐진 내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웃으면서 간지럽지 않느냐고 묻고는, 더 아래쪽으로 손을 뻗쳐 갔다……. 내가 너무도 급작스럽게 펄쩍 뛰는 바람에 선원복이 찢어졌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나느 “어머! 이런 바보 녀석!”하고 그녀가 외치는 사이에 재빨리 달아났다. 나는 정원 구석까지 달려갔다. 거기서 나는 채소밭의 작은 빗물통에 손수건을 축여서 이마에 대고, 뺨이며 목이며 그녀가 건드린 모든 곳을 닦고 문지르고 했다.
어떤 날은 뤼실 뷔콜랭이 ‘그녀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갑자기 그녀를 사로잡아서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 미스 애시버튼이 부리나케 아이들을 데리고 가 보살폈지만, 침실이나 응접실에서 나오는 그 무서운 외침 소리를 못 듣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치다시피 된 외삼촌이 수건, 오드콜로뉴, 에테르를 찾아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 외숙모가 나타나지 않은 저녁 식탁에서, 외삼촌은 근심스럽고 늙은 얼굴 모습을 보였다.
발작이 거의 진정되면, 뤼실 뷔콜랭은 자기 곁으로 자녀들을 불렀다. 로베르와 쥘리에트를 부르는 것이었다. 알리사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 날이면, 알리사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때때로 아버지가 그녀를 보러 가곤 했다. 그분은 자주 알리사와 얘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외숙모의 발작은 하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발작이 유난히도 심하여, 응접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덜 감지하게 되어 있는 어머니의 방에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머물러 있던 어느날 저녁, 식모가 고함을 지르며 복도를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빨리 내려오세요, 마님이 돌아가세요!”
외삼촌은 알리사의 방에 올라가 계셨다. 어머니가 외삼촌을 만나러 나가셨다. 15분쯤 후, 내가 머물러 있던 방의 열려진 창문 앞을 두 분이 무심코 지나가실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말해 볼까, 이건 모두 다 연극이란 말이야.” 음절을 끊어서 발음하는 ‘연극’이라는 말이 몇 차례나 들려 왔다.
이것은 우리가 상을 당한 2년 후, 방학이 끝나 갈 무렵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외숙모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을 뒤집어엎은 슬픈 사건과, 그 사건의 전말에 조금 앞서서 그때까지 내가 뤼실 뷔콜랭에게 품고 있던 복잡하고도 모호한 감정을 순전한 증오심으로 바꾸어 놓은 조그만 정황을 얘기하기에 앞서, 나의 외사촌 누이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되었다.
알리사 뷔콜랭이 예쁘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단순한 아름다움의 매력과는 다른 매력에 의해 그녀 곁에 이끌려 갔고, 그녀 곁에 머물렀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어머니와 매우 닮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갖는 표정은 너무도 달랐으므로 내가 모녀가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묘사할 수가 없다. 얼굴의 윤곽과 눈의 빛깔마저도 내 표현을 벗어나고야 만다. 지금도 다시 나에게 떠오르는 것은, 그때부터 벌써 슬픈 빛을 띠고 있던 그녀의 미소와, 눈과 떨어져서 커다란 호선(弧線)을 이루며 눈 위로 그렇게도 유별나게 올라붙은 그녀의 눈썹의 선뿐이다. 나는 그런 눈썹을 아무 데서도 본 적이 었다. 단테 시대의 피렌체의 작은 조상(彫像)에서 말고는, 그래서 나는 어린 베아트리체도 그녀처럼 넓은 호선 모양의 눈썹을 가졌으리라고 즐겨 상상했다. 그 눈썹은 시선에, 몸 전체에, 근심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신뢰하는 듯한 질문의 표정, 그렇다. 열정적인 질문의 표정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이며 기다림일 뿐이었다……. 이 질문이 어떻게 나를 사로잡았고, 나의 인생을 이루었는지를 나는 당신들에게 얘기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쥘리에트가 더 예뻐 보일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쾌활함과 건강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의 우아한 맵시에 비할 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외면적이고 누구에게나 단번에 드러나는 듯싶었다. 외사촌 동생 로베르로 말하자면, 아무런 특이한 점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저 내 나이 또래의 사내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쥘리에트와 로베르와 함께 놀았다. 알리사와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우리의 놀이에 끼어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멀리까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진지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두 어린애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는가? 나는 곧 그것을 당신들에게 말할 것이지만, 우선은, 그리고 나중에 다시 외숙모 얘기를 하지 않기 위해, 외숙모에 관계되는 얘기를 끝마치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태 후, 어머니와 나는 부활절 방학을 지내러 르아브르에 갔다. 우리는 시내에서는 꽤 비좁게 지내는 뷔콜랭가가 아니라 ,집이 더 넓은 어머니의 언니 댁에 머무르게 되었다. 내가 드물게밖에는 뵐 기회가 없었던 플랑티에 이모님은 오래 전에 홀몸이 되신 분이었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성격도 아주 다른 그분의 자녀들과 나는 겨우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 ‘플랑티에 댁’ ―르아브르에서는 그렇게들 말한다―은 시내가 아니라, ‘언덕’이라고 불리는, 시내가 굽어보이는 언덕배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뷔콜랭가는 상가(商街)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가파른 길로 두 집 사이를 재빨리 오갈 수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가파른 길을 굴러 내려갔다가는 다시 기어오르곤 했다.
그날 나는 외삼촌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얼마 안 되어 외삼촌은 외출하셨다. 나는 사무실까지 외삼촌을 따라갔다가, 어머니를 찾으러 다시 플랑티에 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나는 어머니가 이모와 함께 외출하셔서 저녁 식사 때에나 돌아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곧장 시내로 다시 내려왔다. 내가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바다 안개로 음산한 빛을 띤 부두까지 가서, 선창가를 한두 시간 배회했다. 불현듯이,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알리사를 찾아가서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달음질쳐 시내로 가로질러 가서, 뷔콜랭 댁의 문간 벨을 울렸다. 벌써 나는 층계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 준 하녀가 나를 제지했다.
”올라가지 마세요, 제롬 도련님! 올라가지 마세요, 마님이 발작을 일으키셨어요.”
’내가 만나러 온 것은 외숙모가 아닌걸……’ 하고 생각하며, 나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알리사의 방은 4층에 있었다. 2층에는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3층에 외숙모의 방이 있는데, 거기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앞으로 지나가야만 했다. 방에서 흘러나온 빛줄기가 꺾여 비치고 있었다. 눈에 띌까 두려워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숨겼는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는 아연실색했다. 커튼이 쳐 있었지만, 두 개의 가지가 달린 큰 촛대에 밝힌 촛불들이 상쾌한 밝은 빛을 뿌려 주고 있는 방 한가운데에, 외숙모가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로베르와 쥘리에트가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중위 복장을 한 낯모를 젊은이가 있었다. 그 두 아이가 거기 있는 것이 오늘에 와서는 내게 기괴해 보이지만 ,당시의 나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오히려 안도감을 주는 것이었다.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 낯선 사람을 그들은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뷔콜랭! 뷔콜랭!…… 내게 양이 한 마리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걸 뷔콜랭이라고 부를걸.”
외숙모 자신도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나는 외숙모가 젊은이에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자 그가 불을 붙여 주고, 외숙모가 몇 모금 빠는 것을 보았다.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나이가 그걸 주우려고 대뜸 일어서더니, 숄에 발이 걸린 척하며 외숙모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 이 우스꽝스런 연극 덕분에, 나는 눈에 띄지 않고 빠져 나갔다.
나는 알리사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웃음소리와 요란스런 말소리가 내 노크 소리를 감쌌던 모양으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문을 밀자,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방 안이 벌써 너무 어두컴컴해져서 나는 곧바로 알리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황혼 빛이 스며드는 창유리에 등을 돌리고서,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일어서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제롬, 왜 다시 왔지?”
나는 그녀를 포옹하려고 몸을 굽혔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 순간이 내 생애를 결정지었다. 나는 아직도 번민하지 않고서는 그 순간을 되새길 수 없다. 알리사의 비탄의 원인을 아주 불완전하게밖에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그 팔딱거리는 작은 영혼에게는, 흐느낌으로 온통 뒤흔들린 그 연약한 육신에게는, 그 비탄이 너무도 격심한 것임을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 곁에 선 채 머물러 있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솟구치는 새로운 격정을 표현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에 그녀의 머리를 껴안고 내 영혼이 흘러넘치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 사랑과 연민의 정에 도취되어, 감격과 자기희생과 덕성이 뒤섞인 모호한 감정에 도취되어,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불렀고, 이제 내 인생의 목적은 공포와 악(惡)과 생활로부터 이 아이를 보호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내 신명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나는 마침내 기도의 염(念)에 가득 차셔 무릎을 꿇었다. 내 몸으로 그녀를 감쌌다. 어렴풋이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롬! 그들이 너를 보지 못했지? 자! 가봐! 그들의 눈에 띄면 안 돼.”
그러고는 더욱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롬,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가엾은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셔…….”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랑티에 이모와 어머니의 끊임없는 수근거림, 뭔가를 숨기는 듯 안절부절 못하시는 두 분의 걱정스런 태도, 두 분이 은밀히 얘기하시는 데 다가갈 때마다 나를 쫓아내시며 “얘야, 저리 가서 놀려무나!” 하시던 말씀, 이 모든 것은 두 분이 뷔콜랭가의 비밀을 모르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우리가 파리에 돌아오자마자 전보가 와서 어머니는 르아브르로 되돌아가시게 됐다. 외숙모가 달아났던 것이다.
”어떤 남자하고요?” 어머니가 나를 맡겨 두셨던 미스 애시버튼에게 나는 물어보았다.
”얘야, 그건 어머니께 여쭤 보려무나.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구나.” 그 사건에 망연자실해지신 그 다정한 노부인이 말했다.
이틀 후 그분과 나는 어머니를 만나러 떠났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외사촌 누이들과 교회에서 만날 것이었는데, 오직 그것만이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의 어린애 같은 정신은 우리들의 재회의 그러한 신성화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외숙모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어머니에게도 캐묻지 않는 것이 명예로운 태도라고 여겼다.
그날 아침 교회당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보티에 목사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누가 13:24]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의 대본으로 삼았는데, 아마도 그건 의도적으로 그러셨을 것이다.
알리사는 내 앞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녀의 얼굴 옆모습이 보였다. 나는 자신을 완전히 잊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내가 정신없이 듣고 있던 그 말씀도 그녀를 통해서 들려오는 듯이 여겨졌다. 외삼촌은 어머니 곁에 앉아 울고 계셨다.
목사님은 우선 절(節) 전체를 읽으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 7:13~14] 그러고는 주제를 분명히 나누면서, 우선 넓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꿈속인 듯 정신이 멍한 채로 외숙모의 방을 다시 보았다. 드러누워 웃음 짓는 외숙모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역시 웃고 있는 미남 장교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자 웃음이며 희열의 개념 자체가 기분 나쁘고 모욕적인 것이 되었고, 죄악의 가증스런 과장처럼 변했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보티에 목사님이 다시 읽으셨다. 웃고 까불며 행렬을 이루어 전진하는 화려하게 꾸민 무리들을 목사님은 묘사하셨고, 나는 그런 무리들을 보았다. 나는 그런 무리 속에는 자리 잡을 수도 없고, 자리 잡고 싶지도 않다고 느꼈다. 내가 그런 무리들과 함께 내디딜 한 걸음 한 걸음이 알리사에게서 나를 떼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대본의 첫머리로 되돌아 가셨고, 나는 그리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할 좁은 문을 보았다. 내가 잠겨 있던 꿈속에서, 나는 그 문을 일종은 압연기(壓延機)처럼 상상했으며, 유별나게 고통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하늘나라의 지복(至福)의 맛이 미리 섞여 있는 듯한 노력을 기울여 나는 그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또다시 알리사의 방 문이 되었다. 그리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작게 축소했으며, 나에게 잔존하는 에고이즘의 모든 것을 비워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으니, 하고 보티에 목사님이 계속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모든 고행과 모든 슬픔을 넘어서서, 순결하고, 신비스럽고, 청순한 또 다른 기쁨, 내 영혼이 벌써 목말라하고 있는 그 기쁨을 상상하고 예감했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노래처럼, 또는 알리사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녹아드는 맹렬한 불꽃처럼 나는 그 기쁨을 상상했다. 「묵시록」이 얘기하는 그 흰 옷을 입고, 서로 손을 잡고서 똑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우리 둘은 나아가고 있었다……. 어린애의 이런 몽상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그 몽상을 그대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모호함이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오직 아주 분명한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언어와 불완전한 이미지에서의 모호함일 뿐이다.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보티에 목사님이 끝막음을 하셨다. 그분은 좁은 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설명하셨다…….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나는 그중의 하나가 되리라…….
설교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심한 정신적 긴장 상태에 달해 있었으므로,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는 외사촌 누이를 찾아보려 하지도 않고 빠져나왔다……. 자랑스럽게, 내 결심(나는 이미 결심했던 것이다)을 벌써부터 시련에 부딪히게 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녀에게서 곧 멀어짐으로써 그녀에게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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