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Chr 17:8 CONNECT →

art

박정대 詩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밥 말리, 조르주 페렉, 장 뤼크 고다르에게
지난 겨울의 폭설과 담배들에게
36쪽, 37쪽, 19쪽, 153쪽에게

박정대

 


  짧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읽고 싶은가
  그렇다면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로 가라

*

  나는 단지 ‘백야 153쪽’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시를 쓰고 싶었다
  그뿐이다, 지금 내가 이 시를 쓰는 유일한 이유는 단지 그뿐이다

*

  순서도 없이 쓴다, 누군들 순서를 알 수 있으랴, 밥 말리식 기타의 눈물, 모든 씌어진 글의 다음은 무한, 무한의 다음은 나도 몰라, 나는 어슴푸레한 백야 153쪽에 당도했을 뿐, 누가 무한의 순서를 알 수 있으랴

*

  전체와 무한에 대해 생각하네

*

  카치아 게헤이루의 파두를 들으며 형식의 불안에 대해 생각하네, 고통의 파두, 파두를 듣는 고통, 고장난 세계의 허리로부터 오는 요통, 낮과 밤의 뒤바뀜, 짧은 대낮이면 리스본 근처에 있는 긴쇼 해변을 거닐며 파도들의 리듬을 배우기도 하지만 리스본의 겨울밤 별빛의 폭설 속에서 나는 무한을 생각하네, 순서도 없이 쓰네, 누군들 이 세계의 음악, 고요한 뒤척임의 순서를 알 수 있으랴

*

  이 글은 넉 장의 흑백사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인용과 단상들이 뒤섞일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은 형식에 의해 집결할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체’라고 명명되고 체의 글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불분명하지만 추상적인 많은 것들은 구체적인 사물의 옷을 입고 등장할 것이다
 
  사랑 또한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연민의 감정들은 대낮의 불투명한 유리창처럼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고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 글은 단지 시간의 허공 위에 수놓인 무늬처럼 남을 것이다
 
  나는 넉 장의 흑백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하염없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글은 흑백사진의 뒷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
 
  ‘체’는 독일산 담배의 이름이다, 한 갑에 들어있는 담배는 모두 스무 개비다, 이 글의 필자인 체는 스무 개비 체 담배의 사용법에 대하여 친절하게 말해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친절할지도 모르겠다, 왜 모든 것이 반드시 친절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이 글의 필자인 체는 ‘나’인가, 그건 알 수가 없다, 사실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체는 체 담배를 피우는 동안만 글을 쓸 테고 그것은 체가 알아서 할 문제이다, 나는 그 문제에 관여할 수가 없다, 체
 
*
 
  골루아즈는 프랑스산 담배이다, 나는 간혹 독한 담배가 그리울 때 책상 서랍을 열고 필터 없는 골루아즈를 피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골루아즈가 이 글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글에서 ‘나’라고 표현된 것은 체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가끔씩 골루아즈 담배를 피울 것이다, 나에게도 그러고 싶은 밤은 있는 것이다
 
*
 
  포르투나는 포르투갈산 담배이다, 나는 리스본 공항의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오자마자 포르투나 한 갑을 사서 연거푸 석 대의 담배를 피웠다, 포르투나에서는 해풍에 젖은 아련한 풀잎 냄새가 난다, 나는 파두를 부르는 여인의 입술 냄새를 맡듯 포르투나의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신다, 나의 페부를 한 바퀴 돌아 나온 포르투나의 연기는 리스본의 저녁 하늘로 번져나간다
 
*
 
  포르투갈 기타는 기타하라고 한다, 포르투갈 기타하는 리스본 스타일과 쿠임브라 스타일이 있는데 리스본 기타하는 달팽이의 머리가 쿠임브라 기타하는 기타의 눈물이 달려 있다
 
*
 
  R은 R의 L을 P하는 M이다(소설은 길을 따라 산책하는 거울이다) ― 스탕달 ― 조르주 페렉
 
*
 
  P는 R의 L을 P하는 M이다(시인은 혁명의 자유를 연주하는 자이다) ― 체
 
*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실에 속한다, 따라서 진실의 추구란 그 자체가 참되어야만 한다, 참된 추구는 각 부분이 결과 안에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전개된 진실이다 ― 칼 마르크스 ― 조르주 페렉 
 
*
 
  진리는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 부분적으로는 오류에까지도, 그러니까 내 작품의 등장인물인 브리스 파랭의 말을 빌리자면, 오류는 진리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 장 뤼크 고다르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아웃사이더다, 이 세계는 다만 한 편의 싸구려 영화에 불과하다 ― 장 뤼크 고다르
 
*
 
  나는 인생에 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으므로 결국 지금까지 본 영화들을 베낄 수밖에 없다 ― 장 뤼크 고다르
 
*
 
  매일 아침 밥벌이를 위해, 나는 허위가 매매되는 장터로 간다, 희망에 차서, 상인들 사이에 끼여든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할리우드」에서
 
*
 
  단순하게 말하자면, 광고 산업이란 자동차의 원칙을 사회의 각 분야에 확대하려는 조야한 시도이다, 이상적인 경우, 광고는 인간의 모든 충동과 열망과 노력과의 예정된 조화를 목표로 삼는다, 수공업의 방식을 통해 그것은 집단의식이라는 전자 시대의 궁극 목표를 향해 뻗어간다, 생산과 소비가 제반 욕망 및 노력과의 예정된 조화 상태에 도달할 때, 광고는 스스로 소멸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 마셜 매클루언 
 
*
 
  여자들은 소비 사회와 그 광고 담당자들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는다, 한마디로 여자들은 마르크스의 후예라기보다는 코카콜라의 딸들이기 때문이다 ― 리처드 라우드
 
*
 
  그러나 여자들은 리처드 라우드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여자들은 마르크스의 후예도 코카콜라의 딸들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마르크스와 코카콜라를 낳았기 때문이다 ― 체
 
*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 장 뤼크 고다르, 「결혼한 여자」, 마샤 메릴이 쳐다보는 포스터에 쓰여 있는 말
 
*
 
  관념이 있는 곳은 사물의 내부뿐이다 ―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
 
  실험성은 오직 형식에만 있을 수 있다, 내용은 실험의 대상이 아니다, 내용은 세계에 의해, 인간의 사상에 의해, 또는 개인적 강박관념에 의해 부과된다 ― 호르헤 셈프룬
 
*
 
  내가 세계다, 내가 이 세계의 전부다 ― 체
 
*
 
  나를 실험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의 형식이다 ― 체
 
*
 
  여러 가지 사실로부터 우리는 아마도 퍼즐의 최후의 진리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외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하는 각가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앞서 이미 했던 행위이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 조르주 페렉
 
*
 
  물론 이 이야기는 이렇게, 여기서, 이런 식으로, 조금은 무겁고 느리게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른다 ― 조르주 페렉
 
*
 
  30, 물자 공급
 
  글쓰기와 사랑에 관한 원활한 물자 공급이라는 문제, 물자 공급에 관한 밥 말리적인 시스템의 붕괴, 날씨와 바람의 흐름, 두꺼운 책들에 의해 끊어진 여행가방의 끈, 신발의 여행과 실재의 여행, 내면을 횡단하는 철새들의 철로, 철새들의 눈보라, 눈보라의 나뭇잎, 물자 공급을 담당하는 내면의 트럭을 타고 27일간 나는 수송 물자의 목적지에 관해, 모든 보급품의 단절에 관해 말할 것이다, 고독의 당나귀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고독을 굳이 말하려는 중독된 고독, 러시아, 중앙아시아, 리스본, 말라가, 눈물의 당나귀들, 나는 문득 27일의 시간에 갇힌 불쌍한 밥 말리, 거실의 북쪽과 남쪽의 현관에서, 남쪽의 지원군들과 지원군의 북쪽에서, 변태 성욕자라 불리는 염탐꾼에 대한 한 편의 이야기, 27일, 나는 27일 동안 단 한 편의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이 글이 아닐지라도 나는 뭔가를 끼적거리겠지만 그건 망기타의 사랑 같은 거, 알코올의 심연, 심연의 마음, 이상 기후, 영하의 추위 속에 세우는 나의 리스본 27, 견딜 만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견디지, 27일, 아무튼 견디면서 가자, 나는 가는 것에 중독된 사람, 아무튼 견디면서 사라지자, 나는 사라짐에 중독된 사람, 결국 나는 사라짐으로 가서 유령의플랫폼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가자, 여긴 물자 공급의 세상 나는 아예 보급품이 없는 유령이니까
 
*
 
  31, 이름
 
  글렌피딕 한 병을 다 사미사 눈에 다래끼가 돋았다, 밤하늘엔 둥근 보름달이 돋고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밖을 영하 실내는 영상, 파이프를 입에 문 장 뤼크 고다르를 쳐다보다가 레게 머리에 스웨터를 걸친 밥 말리를 마우스 패드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다
 
*
 
  1, 밥 말리는
 
  밥 말리는 자메이카
  밥 말리는 눈물의 대륙에는 무슨 꽃이 필까
 
*
 
  2, 외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어쩌자고 자꾸 부나
 
*
 
  3, 털신을 사러
 
  간밤에 내린 폭설 때문에 나는 털신을 사러 가야겠다, 털신을 사면 겨울 내내 눈이 와도 좋아, 담배를 사러 갈 때도 술을 마시러 갈 때도 털신을 신고 가야지, 첼로의 눈발, 눈발의 피아노, 폭설의 탄주, 폭설의 연탄, 하얀 호랑이들이 밤새도록 내렸다, 검정 털신을 사러 나는 길을 나선다, 동무들이여, 그대들은 평생 몇 켤레의 털신이 필요한가, 나는 단 하나의 털신을 찾아 집을 나선다, 눈 다래끼와 더불어 눈 내린 겨울 길을 걷는다, 내가 밟을 때마다 눈들이 나를 밀어 올리는 소리, 나는 그 소리와 더불어 사뿐히 허공을 걷는다, 이럴 때 나에겐 지상에서의 고통의 중량감은 없다, 중력으로부터의 약 10밀리미터의 이륙, 고통은 눈발들로 분산되고 나는 애초부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홀로 길을 가는 것이다, 콧수염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머리카락들은 첼로의 현처럼 허공으로부터 떨어지는 호랑이들을 연주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이 천천히 내 의식의 심부에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통을 모른다, 나는 고통이 없다, 나는 천사다, 나는 털신ㅇ르 사러 가는 유령이다, 동무들이여, 우리 함께 털신을 사러 가자, 음악은 허공에 있다
 
*
 
  4, 폭설, 마샤 메릴을 찢어 벽에 붙이다
 
  하루 종일 30센티미터의 폭설이 쏟아지다,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결혼한 여자」에서 마샤 메릴이 쳐다보던 포스터에 나오는 그 말에 대하여 하루 종일 생각하다 결국 그 장면을 책에서 북 찢어 벽에다 붙이다,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하루 종일 창밖으로는 폭설이 쏟아지는데 사방의 고립, 마음은 독립, 톱밥 난로를 지펴야 할 시간인가보다, 고립이 사람의 내면에 불씨를 지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안다, 특히 유년 시절을 산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생각을 해본다, 세르주 갱스부르의 「이니셜 B·B」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생각해본다, 담배를 피우면서도 생각해본다, 마샤 메릴을 쳐다본다, 창밖에는 순백의 눈발이 하염없이 흩날리는데 나무와 집들과 산들과 들판과 차량들과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눈발에 파묻혀가는데 우리의 인생도 저렇게 묻혀갈 것인데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여자의 내면에 폭설이 내린다, 물이 끓는다, 열탕의 고립무원, 샤워를 하는 여자의 내면에 밤새 폭설이 내린다, 제설차는 어디쯤 왔을까, 여자는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창밖을 본다, 어깨에 두른 숄, 먼곳에서 폭설을 밀며 제설차가 지나가고 음악은 반복된다, 물이 끓고 고독은 비등점에 달해 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 제설차는 어디쯤 왔을까, 들판을 나는 까마귀들을 바라본다, 고독이 용맹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난다, 처음부터 출구는 없었다, 물이 끓는다, 여자의 내면에선 밤새도록 폭설이 내린다, 밤이면 샤워를 하고 아침이면 찻물을 끓이며 여자는 내면에 기대어 잠든다, 잠든 채, 오지 않는 제설차와 그 누군가와 각자의 고독을 점령한 폭설에게 묻는다, 사랑에 있어서 도대체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
 
  왜 그렇게 슬프고 쓸쓸해 보이는 거니?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 밥 말리, 「깨어나고 있어 Coming In from the Cold」
 
  창밖으로 바람이 불고 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바람의 길을 따라 폭설이 내린다
 
  외로울 때는 저녁을 먹어두자, 그러면 깊은 밤이 와도 견딜 수 있으니까
 
*
 
  지금 시각은 10시 58분, 그녀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나뭇잎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아무튼 이 두 가지를 함께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1월 어느 밤의 끝이 시작되는 지금 그 모두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 체
 
  마샤 메릴을 바라본다
 
  벽에 걸린 1964년의 마샤 메릴,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
 
  5, 1964년의 마샤 메릴
 
  1964년의 마샤 메릴은 아름답다, 트라이엄프 광고판 아래 서 있는 마샤 메릴은 아름답다,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라고 쓰인 포스터 앞에 있는 마샤 메릴은 아름답다, 전신 거울 옆에 있는 마샤 메릴은 아름답다, 36쪽과 37쪽에 나오는 여섯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36쪽과 37쪽에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벽에 붙어 있는 36쪽과 37쪽의 흑백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응시로부터 온다, 1964년의 마샤 메릴은 나의 응시로부터 생겨났으니까,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권리가 그대를 탄생시켰으니까, 1964년의 마샤 메릴
 
*
 
  질문의 의도와 대답할 권리
 
  “당신은 도덕적인가?”라고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그에게 물었다
 
  고다르 특유의 대답, “물론이다, 내 생각엔 모두가 다 모럴리스트이다, 그러나 그 말이 위선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두 명의 기자들이 더 가까이서 물었다
 
  “당신은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이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하는가?”
 
  고다르는 솔직하고 소심한 사람처럼 이렇게 짧게 대답했다
 
  “글쎄……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거창한 단어다, 그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
 
  혁명의 자정 미사의 새벽
 
  렘브란트의 초상화 아래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 앞에서 상의의 단추를 풀고 있는 여자, 총을 든 병사들에 둘러싸인 채 금발의 미녀에게 입 맞추는 마야콥스키, 대략, 혁명의 자정 미사의 새벽에 일어난 일
 
  밤새 내릴 것 같던 눈발은 그치고 찬바람만이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데 지금 시각은 대략 혁명의 자정 미사의 새벽
 
  고통을 금지하는 법령은 꽁꽁 얼어붙고 고독을 석방하는 전류 흐르는 소리, 전류 속에 오래 심장을 담그고 있으면 대략 이 밤은 지나가기도 하는가
 
  마야콥스키의 러시아, 새벽의 심장, 얼어붙은 강, 대륙을 지나온 바람은 대략 왜 이곳에 당도해서는 음악 소리를 내는가
 
  담배를 피운다, 대략 이렇게 고독을 날리는 것이다
 
  대략, 고독은 이렇게 생략되며 날아가는 것이다
 
*
 
  고다르 영화에 나왔던 트라이엄프 광고판에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브래지어 끈을 치켜 올리고 있는 여자에게 이 밤 내가 하고 싶은 말
 
  춥지 않니?
 
*
 
  조르주 페렉을 읽다가
  ― 구름의 울리포 Ouvrior de Litterature Potentielle
 
  나는 가끔 당신이 속해 있던 울리포가 그립다
 
  작가들의 공화국, 삶은 나의 펜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삶엔 유통기한이 없으니 죽음으로 이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결정 나의 몫, 이 세상에 내가 사는 이유는 그대 하나로 족하다
 
  나는 그걸 경험을 통해 안다
 
  새롭고 낯선 사랑 때문에 가슴이 뛰는가, 나는 내 오래된 골동품 같은 그대가 좋다
 
  내가 만일 잠시 창문을 연다면 그건 내 영혼의 심호흡을 위함이니 담배 연기만으로 삶을 견딜 수는 없는 것
 
  그러므로 생과 한 통의 술은 그 뿌리로부터 젖어있다
  나는 젖어 있음으로 삶에 발을 담근다
 
  R은 R의 L을 P파는 M이다, 그렇다고 치자
 
  나는 거리를 방황하는 예술가들이 구름의 울리포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막과 초원과 고원으로 한줄기 빗방울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꿈의 제국이 없으니 사람들은 공포와우울을 너무나 빈번히 사용한다
 
  그래서야 어떻게 우리의 짧은 인생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당신이 속해 있던 울리포의 밥 냄새가 그립다
 
  글쓰기는 노동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노동의 글쓰기
 
  나는 노동을 통해서만 나의 밥을 구할 것이다, 살인 청부업자, 부동산 중개인, 정치를 하는 G자식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한다
 
  고통이 나를 섬세하게 한다, 나의 섬세함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
 
  나는 계절을 통해 그걸 느낀다
 
  경험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상상이 꿈꾸는 무한한 미래인 것이다
 
*
 
  「조르주 페렉을 읽다가」라는 글을 쓰다가 나는 「밥 말리와 함께 하는 통북투 52일」이라는 글을 구상해본다
 
  그러나 구상만 해볼 뿐 지금 쓰고 싶지는 않다
 
  「밥 말리와 함께 하는 통북투 52일」은 다음 페이지에서 독립된 글로 감상할 것
 
*
 
  울리포는 잠재태 문학의 공동 작업실Ouvrior de Littérature Potentielle의 약자다
 
  아울러 페렉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 소설 『사물들』(1965)로 르노도 상을 수상한 조르주 페렉(1936~82)은 1967년 새로운 문학 형식을 모색하는 단체인 울리포에 가입하면서 한층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시인 레몽 크노와 수학자 프랑수아 르 리오네를 중심으로 한 울리포의 작가들은 특이한 형식, 말장난, 수학 공식, 복잡한 틀을 적용해 문학작품을 쓸 때 상상력이 더 발휘된다고 생각하여, 형식적 제약 속에서 내용이 제대로 성립되는 글쓰기를 문학적 도전으로 삼았다
 
  울리포의 실험 정신은 페렉의 모든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 e가 들어가지 않는 단어로만 300여 쪽에 이르는 소설 『실종』(1969)을 썼고, 반대로 『회귀자들』(1972)은 e가 들어간 단어로만 썼다
 
  페렉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생 사용법)(1978)은 이런 실험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서도 인생이라는 주제를 진히자고 깊이 있게 탐색한 소설로 그에게 메디치 상을 안겨주었다
 
  마흔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기까지 소설, 시, 시나리오, 평론,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신만의 분명한 세계를 구축한 페렉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가라는 평을 받는다
 
  페렉의 독자들 중에는 페렉이 아직 죽지 않았다거나 적어도 1982년에는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53일을 택함으로써 자신이 『파르마의 수도원』의 저자만큼 훌륭하지 못하며, 그와 어깨를 견주려는 생각도 없고, 단지 글쓰기를 자극하는 새로운 제약을 스스로에게 부과할 뿐임을 넌지시 비춘 셈이다
 
  그런데 페렉은 스탕달이 1838년 11월 4일부터 12월 26일까지 『파르마의 수도원』을 집필하는데 매여 있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11월을 31일로 잘못 계산하지 않는 이상, 이 날짜를 모두 합하면 53일이 된다
 
  또한 폴리오 전집으로 출간된 그의 유고집 『’53일’』의 표지 삽화는 페렉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엽서의 그림을 이용했는데, 거기에는 ‘통북투Tombouctou 52일’이라 적혀 있다
 
  스탕달의 집필 기간보다 오히려 하루가 짧은 52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작의 발행일은 아마 『파르마의 수도원』이 나온 지 거의 150년 150일째 되는 날이었던 것 같다
 
  모든 설명에는 ‘아마, 거의’가 따라 붙는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페렉의 『’53일’』표지를 보다가
  표지에 사용된 페렉의 그림엽서를 보다가
  당신 생각을 했어요
  거기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요
  페렉은 그 엽서에다가 어떤 말을 썼을까요
  무너진 성곽 아래쪽에 엽서가 놓여 있어요
  당신과 내가 만나면 우리는 통북투 쪽으로
  52일간을 여행하기로 해요
  그러면 적어도 52일간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랑할 수가 있겠죠
  시원한 오아시스를 찾아 함께 물도 마셔요
  「노 우먼 노 크라이」, 밥 말리를 들어요
  그러면 사막의 밤에 돋아난
  모든 별들도 눈물을 흘릴까요
  밥 말리를 따라 부르며
  함께 따뜻한 저녁을 먹어요
  술도 한잔 마시구요
  당신은 레게 머리를 해요
  나는 말총머리를 하지요
  당신은 레게 리듬에 맞춰 춤을 추어요
  그러면 사막이 순식간에 초원으로 바뀌겠지요
  나는 밤새 초원을 말달릴 거옝
  밥 말리는 하늘엔 밥풀 같은 별들이 총총
  생각만 해도 좋죠?
  밥 이야기 하니까 배고프다구요?
  우리 야식 먹어요
  유령들은 살이 찌지 않으니까
  「밥 말리와 함께하느 통북투 52일 여행」에
  당신을 정식으로 초대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통북투가 도대체 뭐예요?
 
*
 
  통북투는 이 세상의 끝, 「밥 말리와 함께하는 통북투 52일」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면 너무 거창해질 것 같아 나는 그냥 다음페이지엔 ‘밥 말리’라는 말이 들어가는 한 편의 시를 쓰기로 함, 그러니까 「밥 말리와 함께하는 통북투 52일」이라는 시는 결국 없음, 시의 없음, 결국은 모든 게 없음
 
*
 
  다음 페이지는 밥 말리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부턴 술을 마셔요, 자메이카의 태양이 뜨는 오늘밤엔 여기까지, 함께 술을 마셔요, 그대 청춘의 지붕 위에 놓인 신발들이 다 젖었으니 달빛에 신발을 말리며 오늘 밤엔 여기까지, 해안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편서풍, 땀에 젖은 머리를 말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우리 함께 술을 마시며 다음 페이지를 넘겨요, 다음 페이지는 밥 말리
 
*
 
  포르투갈 기타 제작 과정
 
  질베르투 그라시오 씨는 리스본의 외곽에 있는 기타 공방에서 기타하를 만들지요
 
  포르투갈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불리는 그는 열일곱 살 때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기타를 아직도 가지고 있지요
 
  그는 지금까지 900여 대의 기타를 만들었고 지미 페이지, 레드 제플린 등이 그의 기타를 즐겨 연주하지요
 
  기타하를 몇 대 도둑맞은 뒤부터 자신이 만든 기타하에 번호를 붙인다는 그가 최근에 만든 기타하는 449번이지요
  지금 그는 스위스로 갈 기타하를 바라보며 기타하는 자신의 자식과도 같다고 말하지요
 
  질베르투 씨는 현재 시의 지원을 받아 기타하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죠
 
  수강생들에게 수업료는 무료구요
 
  기타하의 음색을 만드는 과정, 각각의 사물이 결합해 음악에 이르는 과정, 질투의 파두를 연주하는 기타하 연주자들의 삶의 과정, 그 모든 출렁임의 과정
 
  그게 바로 기타하를 만드는 과정이지요
 
  36쪽과 37쪽에는 나와 있지 않은 포르투갈 기타 제작 과정
 
*
 
  Just Tell Me Who It Was, John Cheever
 
  이제 좀 그만 중얼거릴래?
 
  그녀가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에서 소리쳤고 그 순간 내게는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베로니카를 상상해냈는데 그렇다면 다른 여자들, 가령 검은 눈을 한 금발의 여자들, 발랄한 붉은 머리에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지닌 여자들, 생각에 잠긴 가무잡잡한 여자들, 무용수들,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을 상상해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키 큰 여자들, 키 작은 여자들, 파르스름한 빛이 도는 검은 눈의 여자들, 곁눈질을 하는 여자들, 보랏빛 눈을 한 온갖 부류의 여자들이 다 내 여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베로니카가 나를 떠나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단지 다른 여자가 들어설 자리를 비워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의 모든 그녀들이 나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단지 이런 게 아니었을까?
 
  ― Just tell me who it was![각주:1]
 
*
 
  6, 어디론가 떠나려는, 멈추려는, 멈추어 선
 
  호텔 벽에 기대어선 안나 카리나[각주:2]를 바라봅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멈추려는, 멈추어 선, 그녀, 그녀는 지금 자기만의 인생 속에 있습니다
 
  어느 골목을 지나왔는지, 그녀의 눈동자엔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발 흩날립니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하므로 1월의 어느 추운 밤 담배 한 대 피우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이지만 어디론가 떠나려는, 멈추려는, 멈추어 선 그녀의 시간은 어느 겨울의 골목이었을까요
 
  큰 가방을 들고 호텔 벽에 기대어선 그녀의 외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밤입니다
 
  외투에 스며든 바람과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공기들에 관해 생각해보는 자정도 훨씬 지난 1월의 밤입니다
 
  사랑과 연민이 함께 깨어 있는 밤입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까마귀 한 마리 하늘을 날고 지상엔 촛불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하얀 불꽃을 머리에 이고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멈추려는, 멈추어 선 지상엔 사흘 밤낮을 폭설이 내려 차갑게 얼어가고 있는데
 
  지금 내 시선의 고독이 응시하는 여기는 결빙의 고독기
 
  빙하의 여행기
 
  제설차가 밀어놓은 해안의 눈발을 헤치며 난바다를 지나 먼 대륙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쇄빙기
 
  자정 너머 유리창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유령의 하늘 아래 바람이 몰고 가는 쇄빙선 한 척 만이 보입니다
 
  그 고요의 이름은 ‘안나 카리나 쇄빙선 1962호’ 입니다
 
*
 
  19쪽
 
  추억이 없는 세계, 기억이 남겨지지 않은 세계, 시간은 여전히 지나갔지만 황량한 날들과 시간들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절대적인 무관심의 세계 속에서, 기차가 도착하고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면 기계와 의약품이 부두에 내려졌고 다시 인산염과 기름을 실었다
 
  생활용품을 실은 트럭들이 마을을 가로질러 기근이 한창인 남쪽을 향해갔다
 
  그들의 삶은 날마다 똑같았다
 
  수업 시간, 에스프레소, 저녁의 오래된 영화들, 신문, 말십자놀이, 그들은 몽유병자와 같았다
 
  더 이상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그들에게도 소유의 광기가 불처럼 일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기억이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되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그들은 앞으로 당겨진 화살처럼 초조함과 욕망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몹시 부드러운 그러나 장엄한 비극을 닮은 듯한 무엇인가가 그들의 지루한 삶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매우 오래된 꿈의 잔해 속에 형편없는 파편 속에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장거리 달리기의 끝 지점에, 6년 동안 그들의 삶이었던 모호한 궤적의 마지막에, 어느 곳으로도 이끌지 못하고 어느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확실한 모험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었다
 
  추억이 없는 세계, 기억이 남겨지지 않은 세계, 시간은 여전히 지나갔지만 황량한 날들과 시간들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처럼 계속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것은 그들 인생의 19쪽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조르주 페렉의 어느 책 113쪽과 114쪽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일어났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 모두가 삶의 한가운데에서 겪었던, 비일비재한 사건의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각주:3]
 
*
 
  눈을 뜨고 커튼을 열자 산허리에 안개가 자욱했다
 
  분명 아침인 것 같은데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들, 하얀 눈발 위로 소리 없이 바람들이 몰려다니고 나는 침묵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움이 속된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청춘이 다 지난 내 감정의 우듬지에서 말없이 흔들리며 서서히 피어오르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단 한 대의 기타도 지니고 있지 아니하였고 부를 만한 노래도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그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물들에게 담배 연기의 연주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스러운 감정의 근원이 알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우고 나자 다소간의 현실감이 밀려왔다
 
  지난밤의 숙취, 지난 세월의 숙취들, 나는 문득 아득한 견기증에 사로잡혔다
 
  지난 숙취의 날들 속에서 내가 무수히 내뱉었던 말들이 뾰족한 화살이 되어 내 심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 앞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헌신했지만 사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있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유리창 밖은 어느새 캄캄하게 어둠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고 오래간만에 장을 보러 나갈 준비를 했다, 나에겐 지금 몇 병의 술과 조금의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마트에 들러 쌀 한 포대와 내가 즐겨 마시는 몇 병의 술을 사들고 돌아올 것이다
 
  리스본 외곽에 위치한 나의 숙소를 서서히 어둠이 점령해오고 있었다,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파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실감이 없었다
 
  창밖은 온통 어둠뿐인데 왜 나는 백야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일까, 사흘 밤낮을 퍼부었던 눈발이 녹지 않았기 때문니가
 
  나는 음악을 몇 개 구해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이 겨울을 날 것이다, 커튼의 안과 밖에서 미풍과 광풍이 교차하며 불어갈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나는 침묵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다만 넉 장의 흑백사진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나의 고독은 그렇게 무르익어갈 것이다
 
  그것이 다인 것이다, 무엇이 더 있겠는가,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
 
  7, 단 한 줄도 글을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그렇게 보낸 하루
 
*
 
  8, 나는 말라가
 
  백야의 첫 페이지엔 밤새 눈이 내리는데 젖은 스웨터의 영혼만이 고요히 말라가는데 그대를 죽도록 사랑해서 나는 폭설의 백야 그대를 죽도록 사랑하는 나는 무한의 백야 내가 걸어가는 아침과 대낮 위로 한없이 내리는 그대 내가 걸어가는 어두운 저녁 위로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그대 그대를 죽도록 사랑해서 나는 말라가 그대를 죽도록 사랑하는 나는 말라가
 
*
 
  9, 저녁에 일어나다

저녁에 일어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어두워지는 눈 덮인 들판을 바라보다
 
  시차에 적응할 수 없는 나날들의 현기증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오며 바라본 밤하늘엔 초저녁 별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떠 있다
 
  고독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나는 이 공장에서 열심히 고독을 생산하는 노동자인 것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을 읽다
 
  그의 소설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면서도 뭔가 가슴 한쪽에 찡한 울림을 준다
 
  경쾌한 발언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슬픔의 개인사, 날씨들의 세계사
 
  저녁 겸 아침을 든든히 먹고 커피 석 잔 담배 넉 대, 다시 작업 시작
 
  이곳의 기온이 드디어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밤하늘의 별들은 얼어붙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나도 언젠가 저 별들과 함께 허공을 따라 나의 길을 가겠지만 지금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창밖의 어둠을 보며 날씨의 세계사를 적어나가는 밤
 
  고독은 꾸준히 생산되지만 아무도 고독을 소비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재활용 중이고 시는 여전히 탄생 이전
 
*
 
  까뻬이아는 그리스산 담배이다, 까뻬이아를 피우면 까마리 해변의 검은 모래 냄새가 난다, 야니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 2월의 바닷바람 냄새가 난다, 나는 까뻬이아를 피운다, 오늘 내 마음의 공항에서 이륙은 없다, 까뻬이아에서는 늘 결항의 냄새가 난다
 
*
 
  소피아네는 헝가리산 담배이다, 소피아네에서는 소피아 향이 난다, 소피아 향을 오래 맡고 있으면 부다와 페스트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된다, 부다와 페스트의 하늘 아래로 오기까지의 내 오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헝가리 헝가리, 대륙을 말달려온 대륙의 먼지 냄새가 난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이 배고플 때는 소피아네를 피운다, 헝가리에서는 소피아네가 가장 아름다운 시가인 것이다, 시인 것이다
 
*
 
  10, 세탁선
 
  양말 한 벌, 속옷 하나, 카디건 한 벌, 면 티셔츠 한 벌을 빨래하다, 열흘 동안의 때를 씻어버리다, 빨래를 옷걸이에 걸어 따뜻한 방의 벽에 걸어놓고 담배를 피우다, 콧물이 나 콧물 감기약을 먹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나오다, 차마고도 외전(外傳).
 
*
 
  11, 하품
 
  하루 종일 하품을 하다, 머리가 몹시 아프다
 
  하루 종일 하얀 호랑이들이 누워 있는 들판을 바라보다
 
*
 
  백제(百堤)와 소제(蘇堤), 중국말로는 빠이띠와 쑤띠, 두 시인이 서호에 제방을 쌓았다네, 백거이와 소동파여, 제국의 제방을 거닐며 시를 쓸 때 서호에 출렁이던 인민의 눈물을 그대들은 보았는지
 
*
 
  12, 백야 153쪽
 
  레게 머리에 스웨터를 입은 사내가 노래를 부른다, 나는 스웨터를 입고 말총머리를 하고 콧물을 흘리며 노래를 듣는다, 겨울밤이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 누군가 노래를 듣고 싶은, 겨울밤이다, 누군가 자꾸만 울고 싶어지는, 누군가 자꾸만 그 눈물에 전염되어가는, 겨울밤이다, 녹차 한 잔의 겨울밤, 누군가 파두를 부르고 싶은, 누군가 고요히 책을 읽어가는, 녹차 두 잔의 겨울밤이다, 밤이 깊어 세월은 점점 짧아지는데 누군가 피우는 담배도 점점 짧아져가는 겨울밤이다, 스웨터를 입은 사내가 노래를 하고 스웨터를 입은 또 다른 사내는 한밤의 말을 타고 깊고 하얀 벌판으로 떠나가는 겨울밤이다
 
*
 
  한밤에 깨어 축구 경기 중게를 본다, 겨울밤이다, 문밖의 강들은 모두 얼어붙었을 것이다, 나는 한밤에 깨어 낯선 나라의 선수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본다, 겨울밤이다, 담배를 피울까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창문을 열기 싫은 겨울밤이다,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아까부터 물이 끓고 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펄펄 끓어오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밤이다, 출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겨울밤이다,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어야겠다, 라면을 먹고 뜨거운 국물엔 다 식은 차디찬 시나 하나 말아 먹어야겠다, 농담인데 하나도 우습지가 않다, 바야흐로 겨울밤인 것이다
 
*
 
  마츠오 바쇼가 동북 일본을 여행하려 할 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여행을 떠났다고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멀쩡히 다시 돌아왔다, 걱정은 엉겅퀴 수프를 끓일 때 양념으로나 넣는 것, 국수를 삶을 때 맛있게 삶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상념을 국수 고명으로 살짝 얹어놓는 것, 결국 국수를 맛있게 먹는 것은 겨울밤을 건너가는 외로운 영혼들의 일이니까, 오늘도 나는 내 상념의 건더기 스프를 넣고 나만의 국수를 삶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바야흐로 국수 삶는 계절
 
*
 
  13, 먼 별빛
 
  담배를 많이 피웠거나 밤하늘의 별을 너무 오래 쳐다보았거나
  가슴이 아프다, 그냥 가슴이 많이 아프다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이륙, 그다음은 무한
 
*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참고 문헌
 
  체, 『시가 두 보루 전집』
  체, 『27 체 담배 사용법』
  체, 『밥 말리는 눈물의 대륙』
  이백, 『굿바이 마이 리빠이』
  Max, 『무한한 형식의 상상과 유한한 상상의 내용』
  이백이십 볼트 氏, 『절전』
  백십 볼트 氏, 『백만 볼트 전류의 고독』
  장조, 『혁명의 라면 여명의 불면』
  단조, 『야바위꾼』
  진 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잡꾼』
  장 드 파,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내가 알고 있는 스물일곱 가지 담배 냄새』
  허블 망원卿,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체, 『지난겨울 내내 리스본 외곽의 허름한 숙소에 투숙했던, 어느 책의 36쪽, 37쪽, 19쪽, 153쪽을 찢어 벽에 붙이고는 내내 바라보던, 밥 말리를 듣고 조르주 페렉을 읽고 장 뤼크 고다르의 영화를 보고 또 가끔은 낡은 녹색 차를 몰고 저녁의 마트로 향하던,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는 몰라도 조금 열린 창틈으로 밤새 담배 연기만이 흘러나오던 그 방에서 ‘혁명, 혁명, 젠장 벌써 여명이야’ 중얼거리던, 부스스한 긴 머리에 검은 콧수염과 흰 턱수염을 기르고 청바지에 두터운 갈색 스웨터를 걸쳤던, 아주 추운 밤이면 톱밥 난로 불꽃 같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하염없이 밤하늘에 총총 빛나던 별을 바라보던, 동양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왔다던, 매일 간식으로 만두를 먹고 주식으로 라면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밤새 무엇인가를 끼적거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보여주며 느낌을 묻던, 평생을 집시처럼 떠돌며 살겠지만 리스본이라면 한 달 정도는 살아볼 만한 곳이라고 말하던, 파두와 파도의 그 불안한 형식 때문에 자신은 리스본을 사랑한다던, 형식의 평화가 어떻게 본질적 고요를 획득하는지 말하던, 벽에 붙여놓았던 넉 장의 흑백사진을 떼어낸 자리엔 자신이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쓴 것이라며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이라는 글을 출력한 A4 용지 24쪽을 벽에다 순서도 없이 붙여놓고 떠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글들을 나보고 어떻게 읽으라고 순서도 없이 붙여놓고 떠난 그, 그의 이름을 왜 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 모든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록』
  체, 『백야 153쪽』

 

 

 

  1. 존 치버의 단편 「망상」의 일부를 조금 변형시킨 것임 [본문으로]
  2. 안나 카리나―장 뤼크 고다르, 「자기만의 인생」, 1962에서 ‘나나’ 역을 맡았던 여배우 [본문으로]
  3. 조르주 페렉의 소설 일부를 다시 고쳐 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