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희
딸기가 점점 썩어버렸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벌어지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맨 처음 딸기를 수북하게 담은 날이 떠올랐다
누구의 집이었지
재미없는 삶이었지
아니 달콤한 말이었지
생경한 거실 한복판에서 멍이 든 손목을 내려다봤다
찬장에 이가 나간 그릇이 쌓여갔다 냄비는 손잡이를 잃고 칼은 무뎌졌다 책이 글자를 지우거나 다 타버린 초가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먼지와 털이 구르는 동안 초침은 타닥타닥 제자리만 걸었다 저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딸기를 짓이겼다
손가락이 부풀었다
일상은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구나
당연한 걸 늘 까먹고 말아서 이렇게 쉽게 멍들어버리는 거구나
방문 손잡이가 덜그럭덜그럭 돌아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데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딸기 아래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물컹거리며 달콤해지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었다
너무 간지러워 긁고 또 긁었다
이것을 부스럼이라 부를지 부질없음이라 부를지
인간 대신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딸기 같은 것도 좋지 않을지
끈질기게 들러붙어 남에게 깨알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한 거구나
새하얗고 여린 열매로서
건넌방에 웅크린 짐승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알겠어
보듬보듬 이마를 매만지면
갓 따온 딸기 향이 죽을 만큼 방안에 채워진다는 것
사랑과 세균이 범벅된 채 몸은 없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하여 이번 삶에선 증오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20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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