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7, 4:27 오후
오늘 내가 가진 이 찝찝하고도 불편한 기분을 어디에든 풀어내야 잠에 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걸 다 풀고 나면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네 시간 전엔 바로 옆옆집에 사는 106호 젊은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네 시간 전에 나는 퇴사한 직장에 다시 들어가 일을 봐주는 날 스스로 다독이며 다음주까지만 잘 이겨내자고 다짐했다.
네 시간 전에 젊은 임신한 여자가 두 명의 자식을 데리고 밖으로 피신하는 동안, 그 네 시간 전에 나는 오늘도 교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8층으로 올라가 짧게나마 내 앞날을 책임져달란 기도를 하고 나왔다.
네 시간 전에 젊은 남자는 지인들에게 나 먼저 떠난다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고, 그 네 시간 전에 나는 집으로 걸어가면서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날 떠나 어딜 가겠니.” 라는 말은 소름끼치게 싫었다.
그리고 그 네 시간 전에 젊은 남자가 죽었다. 열 걸음을 걸으면 닿는 거리에서 오늘 누가 죽었다. 4년 간 같은 층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그의 얼굴조차 끝내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대낮에도 부부싸움을 하며 죽네 사네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던 남자와 여자는 이제 이 아파트에서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남자는 영영 사라져 버렸고, 여자는 남자를 등진 그 마지막부터 아이들과 멀리 떠났다.
그렇게 106호 부부는 결국 소문으로만 남아 버렸다. 창밖으로 들리던 부부싸움과,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와, “죽었어요” 라는 119 구조대원의 말이 이 아파트 내에 남은 106호 부부의 전부가 되었다.
사람이 남기는 건 이름 뿐이라는데, 106호 부부가 이 아파트에 남긴 건 그게 전부였다. 이 아파트에서 그들의 얼굴과 이름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결국 소문으로만 남았다.
요 며칠 나는 계속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서 떠나보낸 사람들과, 정말 온 맘을 다해 진실로 사랑했는데 날 떠난 사람들과, 앞으로 떠나고 떠나버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빠는 오늘도 오래 전 자살했던 당신의 친구 이름을 불렀다. 언젠가 잔뜩 술에 취해서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당신은 사람이 마음에 짐을 잔뜩 쌓아두고 있어서 그게 한 번에 터진거라 말했다.
나도 오늘은 간만에 나와 이별한 사람들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분명 떠나보낸 거 같은데 그들은 아직도 내 속에 쌓여있었다. 언젠가 꼭 한 번에 터져버릴 것처럼, 수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히 내 속에 쌓여있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내 속에 쌓일 사람들이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그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나도 그렇게 터져버릴까. 나도 그렇게 그들처럼 이 세상에, 누군가의 속에 내 이름만 남겨두게 될까.
월요일엔 저녁밥을 먹으면서 엄마 아빠한테 결혼이 두렵다고 말했다. 평생 한 남자를 바라보며 살 자신도 없거니와 날 평생 사랑해줄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다.
아이를 갖게 됐을 때 그 아이를 위해 잠시라도 내 펜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싫다. 내 젊은 나날을 다 바쳐 애써 힘겹게 거머쥔 내 꿈을 아이를 위해 내려놓으라 하면 난 못 내려놓을 거다.
육아를 평생 업으로 지고 가정을 돌보면서 내 일까지 해내며 좋은 엄마로 살아갈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가족을 위한 엄마의 역할을 할 준비가 난 전혀 안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부모가 지녀야 할 책임과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내가 평생 사랑하고 나를 평생 사랑해줄 남편이 이 세상 어딘가 가까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 찝찝하고도 불편한 과업이다. 이 모든 것들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왜 모든 것들엔 상하가 존재할까.
왜 모든 것들은 공평할 수가 없는 걸까. (그래서 왜 아빠 앞에서 우는 아이들을 이웃들은 아빠로 인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을까. 왜 우리는 아빠 혼자 책임을 지게 놔둬야 했을까.)
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들인데 왜 모두 다를까. (무엇이 우리를 다르게 만들까.)
왜 나는, 오늘의 나에게 책임을 묻는 걸까. 오늘의 나는 그저 열심히 하루를 살았을 뿐인데.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를 위해 살면 이기적인 년이란 욕밖에 못 듣는 주제에.
나는 왜 사는 걸까. 남을 위해 살면 어느 순간부터 내 희생과 배려가 그들에겐 당연한 권리가 되는데.
나는 왜 사는 걸까. 성경 말마따나 내가 완전히 죽어야 비로소 내가 사는 이유가 될까.
나는 왜 사는 걸까. 지난 4년 간 내가 꿨던 모든 꿈이 좌절되었던 건 그게 내 삶의 전부였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희망만 바라다 끝나버릴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에게 지금 당장 하나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면,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 왜 태어나냐고 물어보고 싶다.
인간이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한 뒤에야 비로소 성장하는 슬픈 업보를 지녔지 않느냐고. 너의 삶에 지녀야할 업보의 무게가 네 자신에게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울 터인데.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왜 우리는 운명을 운명으로 여기고 살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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